[공유] 신경숙 표절사태를 바라보는 소설낭독 운영자의 눈 this and that





이번 신경숙 표절 사태 관련
아래 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일부 읽어볼 만한 내용이라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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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표절사태를 바라보는 소설낭독 운영자의 눈
- 낭낭스 운영자 맹한승

최소한 글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사람은 자기 글로 독자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공황을 불러일으켰다면 무릎 끓고 사과부터 해야 하는 것이 문학인의 도리이다.

문학다방 봄봄에서 한국 현대소설을 같이 읽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최근의 ‘신경숙 표절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은 싸늘함을 넘어 분노를 금치 못하겠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신씨 만큼은 못 돼도 출판동네와 한때 소설동네(30여 년 전 공동창작단에서 창작활동 했던 일)를 기웃거렸던 사람으로서 이제는 단언컨대 글 쓰는 세상 풍토가 완전히 바뀌지 않는다면 한국 창작시장의 미래는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각설하고 신경숙이 전가의 보검처럼 휘둘러대던 예의 그 답답하고 어리숙하며 두루뭉술한 ‘자기 상처 운운’ 화법은 본 사태에 대한 입장 표명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신경숙은 자신의 작품 ‘전설’이 일본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의 한 상황을 어설프게 베낀 정황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화법으로 음울하게 자신의 상처만 남발한다.

“풍파를 함께 해왔듯이 나를 믿어주시기만 바랄 뿐이고,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이런 일은 작가에겐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다.”(신경숙 작가의 말)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세상에 이보다 더 후안무치하고 교만한 말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무슨 풍파를 해왔으며, 진실 여부와 왜 관계 없어야 한단 말인가?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저지르면 불륜인가?

여기에 한 술 더 떠 문학권력이 돼버린 창비의 입장 표명도 바로 ‘표절이라 보지 않는단다.’ 물론 오늘자 신문을 보니 자신들의 보도가 적절치 못했다고 독자에게 사죄 아닌 사죄를 하고 있다. 지금도 그랬고 그전에도 그랬지만 신씨의 소설은 분명히 미완성이었고, 미숙했고, 재미없었고, 어설펐다. 그런데 그 작품들로 상이란 상은 다 탔고,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포장돼 프랑스와 미국에 번역돼 나갔다. 한 미국 대학의 문학교수는 신씨의 작품을 읽고는 ‘이 정도가 한국 소설의 수준이냐?’며 그 미숙함과 소설 구성의 엉성함, 말도 안 돼는 소녀적 취향으로 본 세계인식에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고 한다.

나는 신경숙 사태는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있어 왔고 그 후로도 쭉 이어져 왔음을 관심 있는 독자들은 다 잘 알고 있는데, 이번 사태는 너무 늦게 터진 감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것도 자기 문단 생활을 접겠다며 한마디로 동시대 작가인 게 부끄러운 ‘이응준’이라는 동료 작가에 의해 터진 일이니 일러 무엇하겠는가.

이러한 사태의 근원은 바로 권력이 된 메이저 문학출판사와 문학평론가, 대표 소설가들로 구성된 거대한 출판자본 카르텔의 ‘문학을 버리고 돈을 택한 후안무치한 작태’에서 비롯되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다 아시다시피 80년대 한국 문학을 순수와 참여로 양분했던 백낙청 사단의 ‘창작과 비평사’와 김현, 김병익 사단의 ‘문학과 지성사’가 한국의 문학계를 양분하면서 사상을 옥죄게 된다. 이후 이들의 문학 양분화를 막고 순전히 문학 중심의 책들을 펴내겠다던 문학동네가 등장하며 더 심각한 문학권력으로 단단히 무장하게 된다. 바로 강병철 대표로부터 오늘 사태의 주인공의 남편인 남진우, 성민엽, 정과리로 이어지는 상업에 찌든 문학평론가, 여기에 문학동네 상이라는 걸 받으며 출판사의 딸랑이를 자임하며 나타난 은희경, 신경숙, 공지영, 김영하 등이 이후 2000년대 소설계를 휘어잡으며 심심찮은 문제를 드러내곤 했다. 바로 이들 사단이 저지른 패악은 독자들에게 소설 선택의 기회를 박탈하며, 그저 재미와 흥미, 말초적 자극만을 강요하는 소품적 작품세계(편혜영, 김연수, 김영하 등)나 미국, 유럽 선호의 이상주의 소설로 치닫게 된다.

여기에 문제를 일으키는 조경란의 ‘혀’나 신경숙의 여러 작품들—기차는 7시에 떠나네. 풍금이 있던 자리—에서 편혜영의 표절 의혹까지 문제가 드러날 때마다 문학동네 소속사 평론가들이 적극적으로 자기 작가 보호막을 치며 의혹을 해프닝으로 마무리짓곤 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순수한 힘(?)을 믿고 실천해야 한다. 예전 창비의 지나친 상업주의로 참여문단의 상업화를 경계한 실천문학사의 치열한 실천정신의 소산들—현기영, 박완서, 김영현, 실천문학 시인들 등등—이나 일부 뜻있는 문학인들의 독자노선 선언처럼 소설소비자로서의 주권을 찾아야 할 때이다. 바로 표절 혐의가 있거나 문학작품으로서 품위를 손상한 작품들—공지영의 이상문학상 수상작, 수준 낮은 소설가의 작품이 문학상 후보로 거론돼 나눠먹는 풍토를 보인 소설가 등—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금의 세계문학이 마치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쥐스킨트, 푸코, 니코스 카잔차키스, 보르헤스밖에 없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출판사들의 횡포를 우리 힘으로 과감히 거부하고 우리가 직접 다양하고 훌륭한 세계작품을 선택하는 지혜로운 현자의 눈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직 우리는 소설을 자신 있게 선택하고 강력하게 권하는 심미안이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우리나라 소설도 영미권이나 일본, 남미 소설, 중동 소설보다 훌륭한 작품들이 다양한 색깔로 펼쳐져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최소한 우리도 세계문학에 자랑할 좋은 선배 소설가들을 많이 낳았다. 이청준, 유재용, 서정인, 최창학, 박상륭, 오정희, 이제하, 윤후명, 박완서, 김원일, 김원우, 전상국, 윤흥길, 김도연, 정찬, 조세희, 최윤 선생님 같은 존경할만한 원로소설가들도 숱하게 많고, 공선옥 천명관, 한창훈, 최수철, 함정임, 김소진, 이혜경, 하성란, 배수아 같은 동년배 소설가들도 있다. 또한 채영주, 백가흠, 김숨, 천운영, 이응준, 한유주, 이장욱, 김애란 같은 빼어난 3040대 소설가들도 수두룩하다.

이제부터 한국현대소설 낭독모임 낭낭스는 문제가 있었던 소설가들의 작품은 작품의 수준 여하를 떠나서 일단 이 소설가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밝히도록 하겠다. 가급적 표절이나 작품의 가치를 훼손시킨 소설가들의 작품은 권하지 않겠으며, 문제 여부를 밝히고 나서 회원님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낭독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소설은 동시대의 첨예한 현실 모순을 가장 민낯으로 보여줘 시대를 공감하고 문제를 성찰하는 자기 성찰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유희기능도 있고, 그밖에 다양한 소설의 기능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시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소설가의 눈과 집필방식으로 독자들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소설가의 양식’은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선택기준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느끼고 시대가 나아가야 할 양심적 가치를 공유하고자 한다. 또한 인문학의 주요한 존재 이유가 진실과 진정성, 문제에 대한 비판정신에 있음을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바로 우리가 소설가들을 가려 읽을 수밖에 없는 우리만의 존재 이유이다.


※ 제 글에 인용한 소설가들은 순전히 제 개인 취향대로 기술한 것임을 밝힙니다.